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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의 사랑이 머무는 곳, 성심원을 다녀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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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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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시
2026/08/10 08:26
최종 편집 일시
2026/08/3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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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의 사랑이 머무는 곳, 성심원을 다녀오다

단정한 붉은 벽돌, 날개 단 듯한 둥그스름한 지붕, 푸른 산자락이 이어지는 널찍한 정원. 동천동을 지나가다 보면, 이렇게 잘 정돈된 풍경을 만나게 된다. 어떤 곳일까 궁금하지만 선뜻 들어가기엔 조심스러운 곳. 성심원 교육관 원장인 진 안드레아 수녀님과 유물관을 맡고 있는 마리요셉파 수녀님을 만났다. 이곳이 지나온 80년간의 여정, 소망과 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왔다.
정문에서 바라보는 성심원 전경
1,200여명 아이들의 아버지, 故 이우철 신부
“다섯  정도는 내가 키울  있겠다”\color{#3373a6}\small\textsf{“다섯 명 정도는 내가 키울 수 있겠다”}
故 이우철 신부는 약현본당(현 중림동 성당)의 나이 어린 보좌신부였다. 1946년, 서울역의 길거리 아이들에게 마음이 쓰인 그는, 다섯 명을 사제관으로 데려와 키웠다. 아이들은 늘어나자 더 넓은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형님이 사제서품 기념으로 준 피아노를 팔아 잠원동으로 옮겼다. 어려서부터 오르간을 배우고 성가곡도 작곡할 만큼 음악을 사랑했던 그에게, 피아노는 얼마나 소중한 물건이었을까. 그렇게 성심원은 시작되었다.
초창기 잠원동 성심원 아이들과 함께 있는 故이우철 신부
"하여간 발로 뛰셨어요."\color{#3373a6}\small\textsf{"하여간 발로 뛰셨어요."}
아이들을 먹이기에는 집안 농지에서 나는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고, 국가나 교구의 도움 없이 오롯이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 “한때 성심원에는 아이들만 200여 명, 직원까지 합치면 300명까지 있었다고 한다. 故 이우철 신부는 그 많은 사람들의 하루 세 끼를 책임지기 위해 온갖 일을 해야 했다. 양계, 양돈, 목공장, 자동차 학원, 벼농사, 과수원에 지렁이 판매까지. “외국에서 온 신부가 차려 주겠다던 마카로니 공장은 결국 사기로 끝났어요. 많이 속으셨어요.” 안드레아 수녀는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신부님은 5개 국어를 하셨으니까, 용산 미 8군까지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하셨대요. 그분들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마리요셉파 수녀의 말이다. 6·25 전쟁으로 모든 게 소실되자, 미 8군이 목조건물을 새로 지어 주었는데, 그마저도 나중에 세 번의 홍수를 겪으며 무너져 버렸다고 한다. 그게 인연이 되어, 본국으로 돌아간 한 미군은 훗날 자신의 재산을 성심원 아이들을 위해 남겨 보냈다고 한다.
마을의 과일가게, 성심원 동산
"다 따먹고 남은 거 가지고 하지 뭐, 같이 나눠먹자.”
국내 최초의 소년 아동양육시설인 성심원이 지금의 번듯한 건물을 갖게 된 것은 2018년으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 동천동 땅은 원래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복숭아, 사과, 포도 등 과일을 키우고 벼농사를 짓던 곳이었다. 故 이우철 신부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유산으로 1967년에 사두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울타리가 없던 이곳을 ‘마을의 과일가게’라고 불렀고, 성심원 동산은 그렇게 넉넉한 마음으로 마을 주민들과 함께 했다. 그때 농사짓던 청년은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 아직도 함께 일하고 있다고 한다.
故 이우철 신부 유물관
1970년대 서울 도시개발로 인해 도심 외곽으로 밀려나 봉천동과 마천동으로 옮길 곳을 찾던 성심원은, 결국 이 과수원 땅으로 완전히 옮기게 되었다. 1984년, 어렵사리 이곳에 아이들 숙소를 짓기 위해 첫 삽을 뜬 바로 다음 날, 신부는 37년간의 사제직을 마치고 눈을 감았다. 그는 아이들이 가정과 같은 환경에서 자라길 바라며 Boy’s Town을 꿈꿨고, 1967년에 이미 만들어 둔 설계도는 성심원 유물관에 아직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빚더미에 있었을 때도, 한번도 포기하겠다는 말이 없었어요.”
故 이우철 신부 일기 원본
그는 1939년 신학교 시절부터 선종하기 전날까지 매일 일기를 작성했다고 한다. 지난 2년간 신부의 일기를 정리하며 모든 일기를 다 보았다는 마리요셉파 수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힘들면 몇 번이라도 포기했을 거 같은데, 한 번도 일기에 포기하고 싶다는 얘기는 없었어요..”
어머니가 되기로 서약하다 - 파티마의 성모 프란치스코 수녀회
"한 번도 흔들림은 없더라고요. 신부님의 고난을 보면서도.”
아이들을 함께 키워줄 어머니가 필요했던 이우철 신부는, 1969년 ‘어머니회’를 발족했고, 이는 지금의 ‘파티마의 성모 프란치스코 수녀회’로 자리매김했다. 처음엔 수녀들이 따로 지낼 방이 없어서, 아이들 방 귀퉁이에 있는 골방을 썼다고 한다. 마리요셉파 수녀는 학교 급식이 없던 시절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아침마다 도시락 80개를 쌌는데, 산더미였어요.”
초등학교 교사였다가, 1947년부터 성심원 아이들을 돌봐주며 평생을 헌신한 프란치스카 데레사 수녀. 페스탈로치 이야기에 감동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삶을 꿈꾸다가 1977년부터 헌신하게 된 마리요셉파 수녀. 결혼해 한 가정에만 내 사랑을 바치는 건 인생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다는 진 안드레아 수녀. “온 세상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라도 가겠다고 했는데, 성심원 아이들은 정말 내 손길이 필요하구나 싶었어요.” 이렇게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위해 평생 살겠다는 마음으로 수도자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파티마의 성모 프란치스코 수녀회의 흔들리지 않는 헌신이 있었기에 성심원이 지금껏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수녀들은 매일 기도 시간에 이우철 신부의 일기를 함께 낭독한다고 한다. 그가 남긴 것은 단출한 물건 몇 가지뿐이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남은 이들의 마음을 진동하게 하는 것 같다. “저희가 고민이 많아요. 아이들은 점점 줄어드니까. 신부님이 이렇게 시작하셨는데, 어떻게 뜻을 이어가야 할까 하고.”
묵(黙)·인(忍)·애(愛)
예수 성심이여, 복숭아 봉지 씌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봉지를 씌우는 이 작업은 시간이 많이 듭니다.
혼자서 나무 하나 끝내는데 온종일 걸립니다.
일일이 하나씩 감싸줘야죠. 매만져 줘야지요.
이 작업은 내게 맡겨진 영혼들을 보살피는데 좋은 묵상이 됩니다.
—1975년 6월 28일자 일기 중에서
사실, 성심원의 이야기가 세속적인 내 마음을 이렇게나 잠잠하게 만들 줄 몰랐다. 수많은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들였을 그들의 수고가 그려지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이것을 글로 잘 풀어내고 싶은 마음과 달리 글이 정리되지 않아 애를 먹던 차에, 셋째 아이가 여름내 우거진 마당 잡초를 뽑겠다고 했다. 아이와 같이 흠뻑 땀이 나도록 마당 일을 하고 있으려니, 이우철 신부의 ‘복숭아 봉지 씌우는 작업을 했다’는 일기 내용이 떠올랐다. 복숭아 열매를 하나씩 매만지면서 그의 지치고 고된 마음도 가다듬고 아이들을 위한 기도도 쉬지 않았겠구나 싶었다.
신부는 통일이 되면 북한 아이들도 돌보러 가야 한다고 했단다.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을 향한 그의 열심은 끝이 없었나 보다. 가난했던 시절을 지나 넓고 튼튼한 성심원을 갖게 된 지금도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과 가정이 너무나 많다. 성심원의 다음 80년은 어떤 모습으로 자라갈까. 이우철 신부는 평생 묵·인·애의 정신을 강조하고 가르쳤다고 한다. 시원한 가을날, 성심원 동산을 조용히 거닐며 내 삶에 그것을 조금 담아 본다면, 나도 조금 더 나은 것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 프란치스코 교황의 ‘수도원을 개방하라'는 메시지에 따라, 수도원 성당, 식당, 교육관, 숙소, 정원이 외부인에게 열리게 되었다.
개방 시간 : 평일 오전 9시~오후 5시
개방 구간 : 성심원 입구~동산~교육관 구간 산책 가능, 생활관 및 수녀원은 출입 불가
숙소 문의 : 031-262-5249
카페
경당
응접실
복도
테라스
숙소(2인1실)
글 : 아리
사진: 나디